'돈은 사람과 사람을 잇기도 하고, 끊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은행 문턱은 낮지만, 누군가에겐 아무리 넘어보려 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이다. 담보가 없고 신용등급이 낮거나 당장의 수익성이 떨어지면 은행은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지역사회에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가치를 만들어내더라도, 그것은 '금융의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다.
여기, '사회적 가치'를 '금융의 가치'로 전환해주는 조직이 있다. 2022년 창립한 재단법인 대구사회가치금융이다. 김지영 대구사회가치금융 상임이사는 "은행은 '갚을 수 있는가'를 본다. 우리는 거기에 더해 '이 기업이 왜 필요한가'를 본다”고 대구사회가치금융의 지향을 설명했다.
그의 설명대로 대구사회가치금융은 담보와 신용등급만으로 돈을 빌려주는 곳이 아니다. 기업이 지역에서 무슨 일을 해왔는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어려운 순간을 어떻게 버텨왔는지도 함께 살핀다. 그래서 이곳에선 '관계가 신용'이 되고 '가치가 담보'가 된다. 이자를 '사용료'라고 부르고, 빌린 돈을 갚는 것도 '상환' 대신 '순환'이라고 표현한다. 한 기업이 돌려준 돈이 공동의 재원이 되어 다시 다른 기업을 살리는 돈으로 흘러간다는 의미다.
김 상임이사에게 대구사회가치금융이 지향하는 '금융'은 무엇이고,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물었다.
Q. 먼저 대구사회가치금융이 어떤 곳인지 소개해주세요. '사회적금융'이라는 말 자체가 시민들에게는 조금 낯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우리는 돈을 빌려주고 돌려받는 곳이 아니라, 서로의 지속가능성을 함께 책임지는 곳입니다. 대구사회가치금융은 지역의 사회적경제 기업들이 스스로 돈을 모아 서로에게 빌려주는 사회적금융 기관입니다. 담보나 신용등급이 아니라 '이 기업이 지역에서 무엇을 하고, 어떤 관계를 쌓아왔는가'를 보고 자금을 연결합니다.
사회적금융이란 사회문제를 개선하고 사회적 가치를 증진하기 위해 사회연대경제조직과 관련 사업에 투자·융자·보증 등을 제공해 자금의 지속가능한 선순환을 추구하는 금융 활동입니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사회연대경제기본법안에 담긴 정의로 보시면 됩니다.
Q. 일반 은행이나 금융기관과 무엇이 다른가요? 대구사회가치금융이 말하는 '관계가 신용, 가치가 담보'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
- 은행은 '갚을 수 있는가'를 봅니다. 우리는 거기에 더해 '이 기업이 왜 필요한가'를 봅니다. 그래서 '이자' 대신 '사용료', '상환' 대신 '순환'이라는 말을 씁니다. 회원 기업이 매달 부금을 내는 건 낮은 금리 때문이 아니라 상부상조와 연대의 마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구사회가치금융이 말하는 '관계가 신용, 가치가 담보'라는 말은 숫자로 된 등급 대신, 그 기업이 지역에서 쌓아온 평판과 관계망, 사회적 목적에 대한 진정성을 신용과 담보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Q. 대구사회가치금융은 외부 지원이 아니라 지역 사회적경제 기업들이 직접 돈을 모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의 금융기관을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 출발점은 2019년 대구 동구에서 만든 '동구우애기금'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인 2020년에 담보도 보증도 없이 동료나 이웃 기업의 추천만으로 급전을 빌려줬는데, 모두 제때 갚았습니다. 재단법인 밴드의 도움이 컸습니다. 이 경험을 대구 전역으로 넓혀 2022년 5월, 지역 사회연대경제 주체 32곳이 1억 6,000만 원을 모아 대구사회가치금융 재단을 세웠습니다. 지금 자조기금과 공제부금 등을 재원으로 민간 자금 17억 원을 조성했고, 올해 서민금융진흥원의 5억 원이 더해져 모두 22억 원을 지역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회원사는 60여 곳이고, 매달 내는 공제부금으로 조성한 금액만 해도 3억 원이 넘습니다. 전국에서 수도권을 제외하면 독립적인 사회적금융 중개기관을 운영하는 유일한 사례인 셈입니다.
생각은 단순했습니다. 첫째, 정책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지 않으려면 '우리 돈'을 우리가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 둘째, 보조금은 사라지고 대출 이자마저 수도권으로 빠져나가는 구조에서 돈이 지역에 남아 돌게 해야 한다. 이른바 '지역순환금융'입니다. 셋째, 말로만 있던 '연대와 협동'을 눈에 보이게 조직하는 일, 그걸 금융이 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Q. 어떤 기업이나 사람들이 대구사회가치금융을 이용하고 있나요? 그리고 그 기업과 사람들은 기존 금융 시스템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나요?
- 사회적기업·협동조합·마을기업·자활기업 등입니다. 대구 사회연대경제는 탈북자·장애인·HIV 감염인 같은 취약계층을 지원하던 활동가들의 손에서 생겨났고, 지금도 그런 조직이 많습니다. 이들 사회적경제 조직은 담보가 부족하고 단기 수익성이 낮아 '위험한 차주'로 분류됩니다. 사회적 기여가 아무리 커도 신용등급엔 잡히지 않습니다. 좋은 조직이 돈이 없어 사라지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Q. 금융은 ‘누구에게 돈을 빌려줄 것인가’를 판단하는 일입니다. 대구사회가치금융은 신용등급이나 담보뿐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 가치와 관계를 본다고 했는데, 실제로 어떻게 판단하나요?
- 재무제표도 봅니다. 다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숫자 너머의 맥락'을 읽는 게 우리의 일입니다. 100점 만점의 지표를 바탕으로 서류심사, 현장실사, 외부 전문가 심의위원회 심의 등 3단계를 거칩니다. 사회적 미션의 명확성, 사업 타당성과 상환 가능성, 재무 건전성, 경영진 역량과 거버넌스를 봅니다.
그리고 매출·부채·현금흐름 같은 재무지표와 함께 이 기업이 지역에서 어떤 관계를 쌓아왔는지, 어려운 국면을 어떻게 버텨왔는지를 같은 심사 테이블에 올립니다. 동료 기업의 추천이 곧 보증이 되기도 합니다.
대출 심사는 그 기업의 법인·경영 상태를 누구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는 과정입니다. 기업이 사업에만 몰두하다 보면 법인체로서 갖춰야 할 부분에 공백이 생기기도 하는데, 기존 금융은 그걸 '대출 가부'의 조건으로만 봅니다. 저희는 그 공백을 메워줍니다. 매출은 해마다 상승하지만 재무제표의 기본 구성이 갖춰지지 않아 기존 금융의 벽을 넘지 못하는 기업에는 재무·회계 컨설팅을 제공합니다. 매출채권 성격의 계약서는 있지만 현재 재무 상태로 대출이 어려운 곳에는 자원을 연결해 사실상 '신용보증인' 역할을 합니다. 심사에서 얻은 자료를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컨설팅과 자원 연계에 '선용'하는 셈입니다.
한 반찬 배달 사회연대경제 기업은 경영 위기로 상환이 어려워지자, 그동안 쌓아둔 공제부금으로 대출금 일부를 갚고 다시 부금에 가입해 남은 빚을 갚아가고 있습니다. 공제부금은 '급할 때 빌려 쓰는 돈'이면서 동시에 '쌓이는 자산'입니다. 함께하는 기업이 폐업하지 않도록 길을 찾아주는 것, 그게 공제의 본질입니다.
Q. 사회적 가치를 우선하다 보면 일반 금융보다 위험을 더 많이 감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위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 '어떤 위험은 사회가 함께 진다'는 게 전제입니다. 다만 위험을 감수하는 것과 방치하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가치를 앞세우면 위험을 더 진다는 말은 절반만 맞습니다. 공제부금 대출의 연체율은 4년간 사실상 0%입니다. '위험하다'고 분류된 조직들이 실제로는 가장 성실하게 갚았습니다. 관계와 신뢰가 담보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정직하게 말하면, 공제 이외의 대출에선 연체도 있고 심사가 틀릴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실이 나기 전에 개입하려고 노력합니다. 재무 상태를 함께 점검하고, 필요하면 조합원 출자로 자본을 보강하거나 손실이 예상될 때 배당을 미리 조정하도록 안내합니다. 연대는 눈감아주는 게 아니라, 함께 책임지도록 돕는 것입니다.
Q. 대구사회가치금융이 그리고 있는 최종적인 모습은 무엇인가요?
- 목표는 자립입니다. 보조금에 기대는 게 아니라 자조기금을 토대로, 공공이 마중물을 대면 그 위에 민간 자본이 쌓이는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나아가 단순히 돈을 중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 안에서 스스로 신용을 만들어 돌리는 금융이 되고자 합니다. 기업·사람·지역기금이 맞물리는 도매기금·마중물기금으로 키워 대구 사회연대경제의 '저수지'가 되는 겁니다.
방글라데시 그라민은행이나 일본 신용금고가 단순 대출을 넘어 컨설팅과 삶의 방식까지 함께 바꾸며 차주를 일으켜 세우듯, 캐나다 퀘벡의 데자르뎅 협동조합은행처럼 지역에서 번 돈이 지역으로 되돌아오는 금융 인프라가 되고 싶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자조기금·민간기금 50억 원에 외부 조달 50억 원을 더해 평균 100억 원 이상을 지역 안에 상시 공급하고 순환시키는 것이 목표입니다. 공제 가입 기업은 200곳, 개인 공제 가입자는 최소 2,000명 이상으로 넓히고자 합니다.
올해 6월부터 공제 대상을 기업에서 사람으로 넓혀 '대구우애금고'를 열었습니다. 종사자가 매달 적립하면 급할 때 무이자로 빌려 쓰고, 그 공제기금은 다시 기업의 긴급자금으로도 쓰입니다. 이해관계가 대립하기 쉬운 기업과 종사자가 서로를 떠받치는 '상호기여' 구조입니다. 스페인 몬드라곤의 노동인민금고와 캐나다 데자르뎅이 그 모델입니다.
Q. 이사님 개인의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사회적경제 영역에서 활동해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금융'이라는 수단에 주목하게 됐나요?
- 레드리본사회적협동조합이 대출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HIV 감염 당사자들의 자립을 돕고 공동체적 가치를 만들어온 좋은 기업이었지만, 그 성장성과 지속가능성을 눈여겨보는 금융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레드리본은 사회적금융을 통해 '사회적 자산화'를 이뤄냈고, 그 자산을 씨앗 삼아 사회주택까지 운영하고 있습니다. 신용등급과 담보만을 기준으로 삼았다면 결코 일어나지 못했을 일입니다.
Q. 이사님은 돈을 '연대의 도구'로도 만들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 바꾸고 싶은 것은 관점입니다. 돈은 관계를 끊기도 하고, 잇기도 합니다. 저는 잇는 쪽의 돈을 만들고 싶습니다. 같은 기업도 보는 눈에 따라 평가가 정반대입니다. 재무지표만 보는 금융기관 앞에서는 '엉망인 기업'이지만, 사회적 가치로 보면 '대단한 기업'입니다. 우리는 "실패하기에는 너무 훌륭한 기업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며 대출을 승인합니다." 우리 기업들도 그 사회적 가치로 평가받았기에 사업비와 사회적금융 대출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회적경제 기업의 가치와 성장성을 다르게 바라보는 새로운 평가 시스템, 그걸 만드는 것이 제가 금융에 주목한 이유입니다.
또 연대하고 협동하자는 말은 늘 많이 하지만,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지는 않았습니다. 그걸 눈에 보이도록 조직하는 일을 금융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구사회가치금융의 영감은 제가 이사장으로 있던 레드리본사회적협동조합의 '빅핸즈 우애기금'과 의료연대기금 '레드케어', 그리고 사단법인 대구동구사회적경제협의회의 '동구우애기금'에서 나왔습니다.
신용도 담보도 없는 기초생활수급자는 제도의 공백 앞에서 장발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사회적 연결'은 그 자체로 신용이 되어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고, 가난한 이들의 자부심이 지켜집니다. 현대판 장발장들에게 필요한 것은 시혜가 아니라 '믿음의 마중물'입니다. 스스로 기금을 모아 존엄을 회복하고, 신뢰로 묶인 공동체를 함께 세워가는 것. 그것이 제가 돈을 '연대의 도구'라 믿는 이유입니다.
Q. 끝으로, 대구사회가치금융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요?
- 돈을 우리 손으로 만들고, 지역에 남기고,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 그게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재단은 다섯 가지 방향을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 돈을 우리 손으로 만들기 ▲지원의 폭 넓히기 ▲연대를 눈에 보이게 만들기 ▲지역에 돈을 남기기 ▲기업과 사람이 서로를 떠받치기입니다.
이 길의 한 축이 '임팩트 펀드'입니다. 선배 기업과 조직들이 해마다 매출의 0.1%, 잉여금의 1%를 함께 모으는 '세대 간 연대기금'으로, 대손충당 준비금과 지역사회 문제 해결 사업비, 햇빛발전·돌봄사업 출자 등에 쓰일 예정입니다. 전국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기금입니다.
2025년 말부터 시작해 현재 15개 정도의 기업이 참여하고 있고, 약 5,000만 원을 세대 간 연대기금 성격으로 모았습니다. 이런 기금들이 모이면 미국의 지역재투자법(CRA)이나 지역개발금융기관(CDFI) 기금처럼 관련 제도화를 앞당길 수 있다고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