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민스 여러분, 안녕하세요! 뉴스민 뉴스레터 담당자 김보현 기자입니다. 비가 오는 대체공휴일이네요. ☔
여러분은 가창골을 아시나요? 대구 달성군 가창면에서 경북 청도군 각북면으로 넘어가는 산자락에 있는 골짜기인데요. 이곳에서 한국전쟁 전후 대구에서 일어난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이 처음 이뤄진다고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기사를 보기 전까지 잘 몰랐어요. '73년 만에' 유해 발굴이 이뤄진 배경과 당시 상황, 남은 과제를 천용길 기자님과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10월항쟁 유족의 구술 채록 작업을 하고 계신만큼 유족의 지난 70년 시간은 어땠는지까지 폭넓게 물어봤습니다. 자, 그럼 같이 그날로 들어가 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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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기자: 1950년 6.25전쟁이 벌어졌죠. 당시 국군이 인민군에게 계속 밀려서 후퇴하게 됩니다. 그해 7월, 경북 지역도 인민군에 의해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었는데요. 당시 군과 경찰은 해방 이후 좌익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 보도연맹원(1948년 12월에 국가 보안법이 시행됨에 따라, 좌익 전향자를 보호하고 지도한다는 명분으로 결성한 단체)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적법한 절차 없이 처형을 시킨 거죠. 좌익사상가, 활동가, 또는 좌익에서 활동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미리 파악해 연행·구금하고 목숨을 빼앗기까지 한 이 행위를 예비검속이라고 합니다. 이 예비검속의 주된 대상이 바로 10월항쟁 참가자들이었습니다.
김 기자: 당시 희생된 이들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천 기자: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발표한 ‘대구경북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2010)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재소자,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자가 대상이었습니다. 이들은 1950년 7월 초와 중순 사이 경산 코발트, 가창골짜기, 칠곡 신동재, 본리동 빨래터 등지에서 집단 살해됐어요. 10월항쟁과 관련된 이들이 많았습니다.
1946년 9월 24일 대구에서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총파업에 동참한 노동자들의 시위가 벌어졌어요. 9월 30일 미군정의 식량 정책에 항의하는 시민 400여 명이 쌀을 요구하는 시위도 벌어졌죠. 10월 1일 경찰 발포로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미군정의 식량 정책과 친일 경찰 중용 문제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에 나왔고, 2일부터는 2만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면서 경찰과 충돌이 일어났어요. 미군정은 계엄령을 선포했고, 130여 명이 목숨을 잃고, 260여 명이 다쳤어요. 수천 명이 ‘폭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검거됐는데, 이들이 이후 희생자가 된 거죠.
김 기자: ‘가창골’이라는 지역명이 생소하기도 합니다. 1950년 당시 그 지역은 어떤 동네였나요?
천 기자: ‘골로 간다.’ 죽을 수 있다는 속된 표현인데요. 어원을 알고 나면 쉽게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말이에요. 이들이 끌려간 곳은 죽음 이후에도 은폐가 쉬운 골짜기였어요. 가창골도 그 골짜기 중에 하나인데요. 지금은 가창댐이 있는, 대구 달성군 가창면에서 경북 청도군 각북면으로 넘어가는 산자락에 있는 골짜기입니다. 1954년 이승만 정부 시절 가창댐 축조 공사를 시작했고, 1959년 준공됐어요. 댐이 세워지면서 골짜기에 얽힌 사연은 또 잊혀진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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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24일 대구 달성군 용계리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에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주최하고, 10월항쟁 및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와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이 주관한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을 위한 개토제가 열렸습니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이 약 2주동안 유해를 발굴하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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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기자: 천 기자님은 10월항쟁 유족회의 구술 채록 작업을 하고 계시죠. 지난 70여 년 유족의 시간은 어땠나요?
천 기자: 희생자들의 유족은 4.19혁명 이후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유족회를 만들었어요. 1960년 이미 합동위령제를 열고, 유해 발굴에도 나서면서 제4대 국회에서는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도 만들어졌어요. 그러나 5.16쿠데타로 유족회 간부들이 반국가단체 결성 혐의로 구속됐죠. 이후 유족들은 40년이 넘는 시간동안 입을 다물고 숨죽이며 살아왔어요. 연좌제로 고통받은 시간도 말로 다 할 수 없고요.
유족을 만나 이야기를 모으는 이유는 2가지입니다. 희생자 유족의 연세가 80세가 넘었어요.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말이죠. 국가폭력의 피해와 상처를 고스란히 기록해 치유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위함이에요. 무관심만큼 두 번 상처 주는 일은 없잖아요. 또 하나는 대구경북지역 해방 전후 역사에 대한 기록의 조각을 모으기 위함이에요. 이걸 잘 모아서 다음 세대가 지역의 아픔, 그리고 항쟁의 역사를 잘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제 소명이 아닐까 생각해요.
김 기자: 2010년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 규명이 처음 이뤄졌죠. 2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도 진행 중이라고요?
천 기자: 군과 경찰, 국가폭력으로 희생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데서 의미가 커요. 다만, 진실화해위원회는 기본적으로 신청주의를 적용해요. 신청한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를 하기 때문에 유족이 신청하지 않으면 거의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요. 이 때문에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자가 1,000여 명 넘게 있었다는 진실 규명이 이뤄졌음에도, 희생자에 대한 개별 조사는 먼저 하지 않거든요. 유족들이 신청을 해야 하는 거죠. 이번 유해 발굴과 연계된 대구형무소 사건과 관련해 추가로 신청된 진실규명 사건 60건 중 48건에 대해 조사 개시해 현재 조사 중이에요.
김 기자: 마지막으로 이번 유해 발굴의 의미와 남은 과제를 설명해 주세요.
천 기자: 한국전쟁 전후 대구에서 일어난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이 이뤄진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채영희 10월항쟁유족회장은 “우리의 한을 풀기 위한 일만이 아니다. 아버지들의 뜻을 이어받고 진실을 밝혀 교과서에 남김으로써 후손들에게 정확하고 진실된 역사를 밝히고자 함”이라고 말했는데요. 유족들의 한을 푸는 데도 출발점이 될 수 있는 발굴이에요.
유해 발굴이 이뤄지면 나이, 성별 등을 파악하는 감식 절차를 거치게 돼요. 유해는 세종시에 마련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추모의 집에 안치할 예정인데요. 이번에 발굴하는 면적이 150㎡로 그리 넓진 않거든요. 만약 유해 발굴이 이뤄진다면, 추후 영역을 더 확장해서 유해 발굴이 이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어요. 과거사는 정치의 최전선이자, 사회적 대화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이번 유해 발굴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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